크리스천 역사 자료들
무역과 교류의 시기에 초기 유럽국가들의 찬란한 기독교 문화와 문명이 도입되었다. 시민 봉기 시대의 말에 포르투갈인들이 배를 타고 하나 둘씩 일본에 들어왔고 새로운 유럽 문화를 전했다. 기독교를 비롯한 유럽의 중세 문화가 시마바라 지역에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그 이후 봉건 영주인 아리마 하루노부는 서양과의 교역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스스로 크리스천 다이묘가 되어 기독교 보호에 앞장섰다. 따라서 시마바라 지역은 기독교 왕국이 되는 듯 보였다. 이 지역의 여러 곳에서 교회가 지어졌고, 세미나리요 (<P. 세미나리즈=초등 이론 학교)가 아리마에 문을 열었고 콜레지에오 (<P. 콜레지즈=상급 이론 학교)가 후에 카즈사에 개교했다.
이곳에서 치지와 미구엘을 비롯한 네 명의 소년들이 교황과의 명예로운 인터부를 위해 로마로 여행을 감행하는 영웅적인 업적을 수행했다. 동방과 서방의 협상의 역사에서 빛나는 첫 페이지는 시마바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억압의 시대에 강력한 억압 속에서도 지속된 신앙의 역사를 증거하는 많은 증거들이 수집되어 전시되고 있다.
기독교가 번성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자 추방 명령에서 시작된 에도 쇼구나테의 고립 선언서와 반 기독교 칙령으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강력하고 집중적인 기독교 억압이 시작되었고 이 지역의 주민들은 개종 혹은 죽음이라는 가혹한 선택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가혹한 시대에도 신앙의 자유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숨은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계속 지켜나갔고 다른 성상들 속에 숨긴 예수나 마리아 상에 기도 드렸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성은 일본 전역에 걸친 광범위하고 귀중한 수집품으로 유명하다.
시마바라 봉기 때에 건물의 한 귀퉁이에서 일본 전역을 뒤흔든 봉기 상황을 잘 말해주는 역사적인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영주 아리마의 뒤를 이어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이 성의 새로운 봉건 영주로 이 지역에 부임했다. 새로운 영주는 시마바라 성을 축조했고 시마바라 지역의 통치를 강력하게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시게마사의 아들인 카츠이에(시게츠구)의 다음 통치 때에 지역주민들에 대한 잔혹행위가 계속되어 결국 시마바라 봉기가 발발했다.
30,000 명의 농부들을 이끌고 봉기를 주도한 아마쿠사 시로의 그림, 몇 달 간에 걸친 치열한 접전을 묘사하는 그림, 당시에 사용되었던 손으로 만든 수제 창, 수제 대포 껍질 등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성을 장악했던 농부들이 결국 전멸되었지만 변함없는 신앙심으로 기도를 그치지 않기 위해 그들이 금으로 만든 십자가는 그 당시의 비극을 잘 말해주고 있다.
농민 봉기 이후 시마바라 지역의 남부 지역 전체는 사막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점차 회복되었다. 가혹한 기독교인 박해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충성 시험과 금지된 게시판, 교파와 종파의 기록물들이 이를 증언해 주고 있다.
